우리가 '존경'의 잣대로 남을 견줄 때
'존경할만한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말이 그저 '돈 많은 남자가 최고다'라는 식으로 해석할 때, 그런 해석만이 올바른 것으로 여겨질 때, 우리가 놓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이것은 1) 여자만의 문제도 아니고 2) 남자만 겪는 일도 아니며 3) 인간의 성격,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이토록 저급한 수준에 머무는 것은 사회 전반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정하연 작가의 <신돈>의 결말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백성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독차지한 채, 한낱 천민 출신 땡중인 주제에 왕에게 절대 굽히지 않는 신돈(극중에서 불리는 이름은 편조).
신돈은 권문세족이 들끓는 개성을 벗어나 한양으로 천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입김과 기세에 눌렸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신돈이 '맞는 말'을 하면서 자신을 찍어누르는 것 같아서, 그게 못마땅해서 신돈의 말을 듣지 않는다.
두 사람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진다. 결국 공민왕이 신돈을 죽이네 마네 하는 지경에 이른다.
독대를 한다. 대화가 잘 될 리 없다. 신돈은 끝내 뻣뻣하다. 무릎을 꿇으라니까 절을 하더니 휙 떠나버린다. 죽일테면 죽이라는 거다.
공민왕은 결국 '을'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돈이 떠난 궁궐에서 공민왕은 일그러진 얼굴로 마음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애걸복걸하는 네 모습이 보고 싶었느니라. 한 번만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 내가 너를 살려줄 것이야!"
한녀 욕하는데 왠 공민왕과 신돈 타령이냐?
여기서 공민왕이 보여주는 이 일그러진 못난 자존심.
이게 흔히 말하는 '져주는 남자가 좋다' 어쩌고 하는 심리 상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져주는 남자가 좋다'는 소리나, '존경할만한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말이나,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심리이기도 하다.
'존경'의 잣대를 들이밀며 상대를 이렇게 저렇게 측정하여 깎아내리고자 하는, 설익고 얄팍한 공격성의 표출.
이는 '남자를 존경할 줄 아는 여자'를 찾아 '스시녀' 타령이나 하는 못난 남자들의 내면과 데칼코마니를 이룰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평화가 없다. 늘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이 꼭 내전이다.
만약 외적과의 싸움에 미쳐 있는 사람이라면, 내 파트너가 강하면 강해서 좋아하고, 약하면 약하니까 지켜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내면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은 정 반대로 작동한다. 외적과 싸우기 위해 가까운 사람과 단단히 한 편이 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 반대로, 나보다 더 강한 내 파트너를 두려워하고, 겁내고, 모욕하고 비난해서 깎아내리려 든다. 그러면서도 버리고 떠나지 못해 매달리고, 징징대고, 혼자 괴로워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혼자만의 괴로움에 상대가 '공감'하지 못한다고 또 화를 낸다.
이건 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보편의 문제다.
사람은, 특히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향이 심하다. 그냥 그런 인간적인 현상이 있다.
나는 남들이 그러는 꼴을 볼 때 가급적이면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겪어온 바, 내면에서 내전을 벌이는 인간의 문제는, 남이 도와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뿐인가, 라고도 생각한다.
현안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 남녀 문제의 프레임을 씌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낮아지면서 세상의 수준이 낮아진다.
세상사 모든 문제가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나는 최근 보수 진영에서 벌어지는 이 미칠듯한 찌질한 정치적 풍경과, 그것을 보고 재미있다 좋다 잘한다 시원하다 이러면서 박수치고 킬킬거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평소에는 생각을 할 뿐 말은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냥 말을 하는 날도 있어야 할 것 같다.
존경할만한 남자가 되자, 고 결론을 내리고 갑자기 농담인 척 끝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존경할만한 사람이 되자, 는 어떨까. 존경은 좀 과하니까 존중 정도로 퉁칠 수는 없을까.
하늘과 땅과 바다에, 우리 모두의 내면에, 평화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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