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 2025. 3. 2. 19:00

흰두교의 아트만과 불교의 무아는 대립되는 개념인가?

힌두교에서는 윤회하는 주체를 아트만이라고 했는데 붓다는 무아연기법으로

이러한 실체가 없다고 설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의 무아는 대체로 이러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후기 대승불교로 넘어 오면서 진여, 불성, 성품을 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무아를 설한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있다

 

현상적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환이다 꿈이다 무아다 연기다라는 가르침을

근원적 차원에서는 진여, 불성, 성품이라는 가르침을 설한다

 

무아다, 없다, 환이다라고 하는 이유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기 전에는 모든 것을 실체적 존재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와 나의 근원은 있다

진짜 아무 것도 없다면 지금 같은 우주는 왜 어떻게 있는 것인가

문제는 그것이 형상이 없어서 딱히 뭐라고 할 수가 없는 허공같은 존재라는 것

 

무아라는데 왜 진아를 운운하는가? 라는 사람들은 아직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무아와 진아는 다른 차원에서 설하는 같은 가르침이라는 걸 이해해야 쓸데없이 헛고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교종교학의 발달로 인해 각각의 종교들의 본래 가르침이 소개되었는데

힌두교의 브라흐만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며 진아(아트만)이다

나 자신은 브라흐만이 구체화된 상태로써 나는 곧 브라흐만이다

이것을 범아일여라고 한다

익숙한 표현으로 진여와 진아는 같은 것이다

 

깨달음은 어느 한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승불교를 통해서만 초기불교의 위빠사나를 통해서만 기독교를 통해서만 오직 알라를 통해서만

깨닫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은 개꿈이자 헛소리에 불과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과 단체에는

진정한 깨달음이 없다

바다는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등등으로 불리지만 원래 경계지어지고 분리된 것이 아니며 짠맛은 동일하다

이름과 개념에 현혹되지 말고 이름과 개념이 무엇을 가르키는지 잘 들여다봐라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보지 말고 제발 달을 봐라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meditation&no=8741

 

아트만 - 명상 마이너 갤러리

힌두교에서는 윤회하는 주체를 아트만이라고 했는데 붓다는 무아연기법으로이러한 실체가 없다고 설했다초기불교 경전에서의 무아는 대체로 이러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후기 대승불교로 넘어

gall.dcinside.com

 

불교의 무아와 아트만에 관한 오해이다. 불교는 힌두교가 독립된 불변의 자아를 주장한다고 하는데 아트만은 자아나 에고가 아니다. 불교에 따르면 오온이 무상하여 연기적 자아는 있지만 독립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 즉 업보만 있지 행위자는 없다는 이 무아의 가르침과 유사한 내용이 힌두교의 대표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도 발견된다. 행위는 단자 구나 즉 세 가지 서로 다른 에너지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저절로 일어나며 행위자는 없고 구나가 행위자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을 행위자로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행위자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괴로움과 즐거움, 성공과 실패를 하나로 보며 행위에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초발상’이란 측면에서 생각해 봐라. 시간 공간 속에서 어째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또한 소위 오온이 나라는 관념을 갖고서 어떻게 내면에로의 여행이 가능하겠는가.

그럼 아트만은 무엇인가. ‘바가바드기타’에 ‘아트만이 계절마다 새 옷 갈아입듯이 낡은 몸뚱아리는 버리고 다른 새것으로 옮겨간다’란 표현 때문에 아트만이 독립적이고 불변의 자아(에고)를 의미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이것은 표현상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 경전에서 ‘아트만은 남도 죽음도 없으며 시작도 소멸도 없고 없음이면서 있음이며 생사를 초월한 여여한 모두의 본성’임을 누누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아와는 완전히 다른 불성 즉 참나에 가깝다. 불교 유식학에서 업보를 저장 경영하는 아뢰야식 가운데 무의식적 요소마저 완전히 벗겨진 청정 순수의식에 해당한다고 할까. 전구가 빛의 매개체인 것처럼 삼라만상과 소위 인도의 모든 인격신들도 이 아트만이란 순수의식과 에너지의 매개체이자 나툼일 뿐이다.

그리고 무아나 참나도 꼭 상충한다고 볼 수 없다. 참나인 아트만은 개념을 초월한 자리기에 이름하여 참나고 아트만이지 어떠한 이름도 붙을 수 없는 체험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실제 체험이 아닌 개념으로만 접근한 나머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라는 강력한 관념이자 일종의 상이 형성되어 있었을 거라 본다.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이 당시로선 얼마나 혁명적 방편이자 충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관념화된 아트만에서 비롯된 오해가 지금까지 전해져 숱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형이상학적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한 채, 실질적 체험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부처님의 지혜를 되새겨 볼 만하다.

결론적으로 똑같은 인도라는 지리적 풍토에서 발생했지만, ‘기초발상’이 살아있음에도 민족이나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한 힌두교에 비해 불교는, 물론 불교가 도입된 지역마다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최초의 보편적 종교로서 인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단지 채식과 불살생이 힌두교의 영향이 아닌 오히려 불교가 힌두교에 끼친 선한 영향이라는 점과 흔히 불교에서 생각하듯 아트만이 시간과 공간의 장 속에서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고 개념을 초월한 자리란 점을 기억한다면 최초의 보편 종교이자 ‘기초발상’이 살아있는 불교의 위상은 더욱 빛이 날 것이다.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122

 

불교의 힌두교에 대한 오해 두 가지 - 법보신문

고용석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가 5월14일 ‘불교의 힌두교에 대한 오해 두 가지’ 제하의 기고를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고 대표는 지구온난화 비상협의회 대표와 식생활교육 부산 네트워크

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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