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 2024. 7. 9. 22:30

영화보다 더 극적인 공산치하 서울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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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할 이야기는 전쟁초기,
임신 5개월의 몸으로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을 해야했던 당시 헌병장교 장우주 소령(육사 3기)의 부인, 이정송 여사(당시 23세)의 체험담이다.





[6.25사변이 나던 날 하오에, 남편은 원남동의 집 앞을 지나는 길에 들러, 수원까지 후퇴했다가 곧 돌아올테니 집 잘 보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렸어요.그전해 10월에 결혼한 나는 그 때 임신 5개월이었습니다.

(둘의 결혼식은 49년 10월 19일, 덕수궁에서 있었고 당시 축하객 중에는 윤보선 상공부장관 부부, 여러 군 인사들과 여사의 이화여대 동문들이 참석했던 기록이 있다고)



27일 아침에 남편 부하가 지프로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아주머니 빨리 피란 가세요.우리는 후퇴중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져버려요.
그 때까지도 나는 라디오만 믿고 전세를 그리 비관하지 않았는데 금방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피란이라 하지만 어디 갈데가 있어야지요.
김천의 친정과는 오래 전부터 왕래가 끊어졌고,
그외 대전이나 부산에는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어요.



그날 저녁에 미아리 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려
남편이 전에 하숙했던 을지로 3가의 심씨댁으로 피란을 갔습니다.

28일 아침에는 총성이 잠잠하기에 적이 격퇴 되었나보다 생각하고 원남동 집으로 가려고 밖으로 나가보았지요.
그런데 광화문 쪽에서 보지 못하던 탱크 두 대가 굉음을 내며 다가오는데 탱크 위엔 알몸의 두 청년이 묶여 매달려 있어요.
몇 사람이 탱크 옆에 가더니 빨간 깃발을 휘두르며 만세를 불러요.
그 때야 비로소 나는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을 알았습니다.
가슴이 철렁하며 오금이 떨어지지 않아요.



 


(이걸 직접 보셨을 듯)




다시 심씨댁으로 돌아오는데 탕탕 하고 총소리가 들려 돌아 보았더니 3명의 국군병사가 건물 밑에서 탱크에다 대고 쏘고 있어요.
이내 탱크에서도 기관총 소리가 요란히 울리더니 두 병사는 죽어 넘어지데요.
나머지 한명은 총구를 머리에다 대고 쏘아 자결하구요.

'아! 하느님, 남편을 보우해주소서'
나는 정신없이 심씨댁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가지고 나온 보따리 속에 남편이 남기고 간 조그마한 권총이 있었어요.
'이제 도망갈 수도 없으니 여차할 때에는 이것으로 아까 그 군인처럼 자결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활동 반경)



나에게는 일각이 죽음 같은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시내는 법석대기 시작했어요.
심씨댁에 OO대학에 다니는 20세의 여학생이 있는데, 밖에 나갔다 오더니 공산군을 절찬하는 거에요.
그 학생 부모는 놀라며 너무 날뛰지 말라고 딸을 타일러요.
나는 하도 어이없고 슬퍼서 울었구요.

그녀는 대뜸 자신의 부모를 보고
"그렇게 말하면 반동이에요"라고 쏘아붙이고,
나를 보고는 "당신은 반동의 아내에요.
이제 세상이 바뀐 것을 알아야 해요"라고 꽥 고함을 칩디다.
이제 이 집에 더 있을 수도 없게 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요.



 


(공산치하 서울의 군중집회)


 


(집회에서 선동하는 여성)




29일 오전 10시 쯤입니다.
누가 내 이름을 대며 찾아왔어요.
나가 보았더니 남편의 함흥상업 동창인 김창형이란 자와 전에 서울전화국 교환수를 하던 여자에요.
이 여자는 남로당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을 때 내가 남편에게 사정사정해서 보증을 서고 빼내준 여자에요.(지인인 듯)



그런데 이 여자가 대뜸 반말로
"이 반동의 간나, 나와!" 라고 소리쳐요.

놀랍기도 하지만 분노가 치밀어 오더군요.
그래서 나도 노려보면서 "무슨일로 가자는 거야"라고 맞섰지요.

"효자동 인민위로 가면 알 거야"라고 해요.

남편 동창은 눈을 아래로 깐 채 한 마디도 없구요.
그 자도 남로당으로 체포되어 보도연맹에서 재교육받고 석방된 후 우리집에 자주 놀러왔어요.남편은 그를 동정해서 늘 식사도 함께 하고 외투나 양복 등도 주곤 했지요.


나는 권총을 치마에 감추고 남편 사진과 결혼 전에 둘이 주고받은 연애편지 뭉치,
그리고 한두 벌의 옷가지를 가지고 심씨댁을 나왔습니다.



효자동에 가니까 다짜고짜로 "네 남편 행방을 대라"고 다그치는 거예요.

나는 "모른다"고 한 마디 하고는 눈을 감고 버티었습니다.그 다음에 그들은 국회의사당 근처 종로경찰서장 관사로 나를 데려가더니 2층 한 방에 가두어 둡디다.



그 방에는 낡은 난로가 있었는데 나는 몰래 가지고 온 권총을 그 속에 감추었지요.
다행히도 그 때까지 나는 몸수색을 받지 않았어요.
그 후부터는 매일 남편의 동창과 다른 자가 와서 꼬치꼬치 심문을 해요.
내 남편이 국군 헌병소령이고 내가 그 아내라는 것밖에 뭐 다른 비밀이 있겠어요.
이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도 별의별 일을 다 묻는 거예요.



그자들은 또 나더러 전향을 하면 살길이 트인다고 꾀기도 해요.
전향이란 나의 남편을 고발하고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을 비방하라는 거지요.
죽으면 죽었지 사람 낯가죽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어느날 남편 동창인 김이 혼자 오더니
"아주머니, 권총을 가지고 있을 테니 썩 내놓으시오"라고 해요.

내가 웃으면서
"안심하세요.내가 설령 총을 가지고 있다 치더라도, 당신 같은 배은망덕한 자를 쏘진 않을거에요.
남편이 죽은 것이 판명되거나 나 자신이 욕을 보게 될 때 자살하려는 거니까"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자는 나중엔 애원을 하듯이
"권총만 내놓는다면 어떻게 살려드릴 수 있는데"라고 해요.

"왜 그렇게 총을 찾는 거죠?"

"알다시피 나는 이전에 한 번 전향해서 보도연맹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 입장이 곤란해요.
그래서 권총을 적발해 제출하면 당에서 신용을 얻을 수 있거든요"

나는 이 자를 한없이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현듯 다시 한 번 남편과 만나고픈 생각이 간절했어요.

'벌써 전사했을까, 만약 살아 있으면 한번만 만났으면...죽었다면 그것을 확인한 후 나도 죽자.
그러기 위해선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이 자를 이용해서 탈출해보자'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난로에 감춰둔 권총을 꺼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자 김은 그냥 빼앗다시피 거머쥐곤 밖으로 뛰어나가요.
'아차, 속았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밤 위원회치들에게 밥을 해주는 17~8세의 소녀가 가만히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눈물을 짜면서

"아주머니, 아까 들으니까 내일 총살한대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어야지요"라고 해요.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고도 마음은 잔잔해요.
장우주 소령의 아내로서 훌륭히 죽자고 다짐했습니다.남편 사진과 주고 받은 편지뭉치를 가슴에 꼭 안은 채 밤을 새웠지요.
짧은 한평생이지만 별 후회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잠시라도, 한 번만 더 남편 얼굴을 보았으면...
그리고 뱃속의 아기는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죽는구나 생각하니 역시 눈물이 쏟아집디다.



날이 새고, 김이 들어오더니
"아주머니, 최선을 다했지만 안 돼요.부디 눈감아주세요.主義(주의)를 위해서 입니다."

"배신자!"

"뭐라고 해도 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주의(공산주의)를 위해서니까요."

"배신자!" >
나는 차갑게 이 말만 되풀이했어요.



위원장이란 자가 들어오더니
"오늘 오후 3시에 효창공원에서 총살한다"고 선고하고 나가요.
죄명은 라는 겁니다.

오후 2시가 되니, 위원장과 공산군 병사 2명이 들어와요.
내가 남편 사진과 편지뭉치를 들고 일어서니
위원장이란 자가 "이 쌍 간나년" 하면서 소지품을 몽땅 빼앗아 동댕이쳐요.
밖에는 국군에게 노획한 지프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공산군 병사틈에 끼여 차에 오르니,
남대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이젠 마지막이구나 생각하며 광화문가의 가로수를 보았습니다.
남편과 자주 다니던 거리죠.

'만약 이미 죽었다면 빨리 그 곁으로 가겠고, 살아있다면 혼이라도 꼭 달음질쳐 가겠어"라고 다짐했습니다.

지프가 남대문로터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요란한 공습경보가 울렸어요.
사이렌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미군기 대편대가 날아오더니 이내 지축을 뒤흔드는 폭격 소리가 들려와요.
나도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이 7월 17일에 있었던 B-29 30여대가 동원된 용산대폭격 입니다.


 


(21년 공개된 당시 영상, 실제 기록상으론 7월 16일이고 47대의 B-29가 동원되어 1,500여발의 폭탄을 투하 했다 함)




남대문 부근에서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지하도로 뛰어들어요.
위원장은 "들!"하면서 차를 세우더군요.
이 때 다시 폭격의 제2파,
이건 흙먼지를 뒤집어쓸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요.위원장이나 병사들도 파랗게 질려서 차에서 뛰어내려요.

위원장은 "놓치면 안 돼"하며 제일 먼저 지하도로 뛰어들데요.
병사 한 놈이 내 팔을 끌고 지하도로 들어가려고 하던 참에 폭격의 제3파가 왔어요.
순간 그 자는 얼굴을 감싸고 땅에 엎드리는 바람에 내 팔을 놨어요.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오르더군요.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연이어 제4파, 제5파가 와서 뒹굴며 엎어지고 하면서 정처없이 뛰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청계천의 수표동 골목이에요.

거북종을 그려놓은 장님복술가 박성필씨 집으로 무작정 뛰어들었지요.



주인 박씨는 종을 흔들며 점을 치더니,
신기하게도 내가 사경에서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맞쳐요.
그러면서 저를 위해 불공을 드려주겠다고 해요.
복채는 훗날 내라고 하며 과일까지 올려놓고 저를 위해 불공을 드리더군요.
이러던 차에 이 집에 두 청년이 들이닥쳤어요.
빨간 완장을 찬 것을 보니 이인 것이 분명해요.

박씨는 이 때까지의 불공 내용을 순간 바꾸어 아기를 빨리 낳도록 해달라고 해요.
기지를 부린 거지요.
나 또한 아기를 배고 몸이 아파 불공드리러 왔다고 거짓말을 해 겨우 그 자리를 모면했습니다.



 


(생명의 은인..)




박씨는 불공이 끝난 후 붉은 부적을 한장 주며 남하 도중에 길을 잃거든 태우라는 겁니다.
고무신도 한켤레 얻어 신고서 내 생명의 은인인 이분의 집을 나왔습니다.
분부대로 동남쪽으로 걸어 용산을 거쳐 저녁에 한강변에 이르니,
마침 웬 노인이 조각배를 띄우고 있어요.
이날 낮에 대폭격이 있어 강변에 경비병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께 강을 건네달라고 사정했더니
자기도 마침 영등포에 볼일 보러 간다고 두말없이 태워 주더군요.



 


(타시우)



강을 건너서는 큰 길은 피하고 산으로 올라갔지요.
벌써 밤이 깊어 달도 떠올랐어요.
산등성이까지 오르니 방향을 잡을 수가 있어야지요.낮에 받은 부적 생각이 나서 허리춤에서 꺼내 태우려고 했지만 성냥이 없어 그냥 '남편 있는 곳으로'라고 빌며 내던졌어요.

부적이 떨어진 방향을 따라 밤새 걸었습니다.미신 같지만 믿을 수밖에요.
해가 떠 사방이 밝은 때에는 바위 아래에서 자곤 했지요.



 


(서울 탈출 경로)




그런데 참을 수 없는 것은 배고픔 입니다.
개울물도 마시고 솔잎도 씹어 봤지만 허기는 가시지 않아요.
이렇게 산을 타며 3일째 걷다가
그날 밤, 그러니까 7월 20일 밤이죠.
어찌 하다가 길가로 나왔어요.
산보다는 걷기 쉽고 해서 그냥 가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구냐고 소리쳐요.
자세히 보니까 총 든 공산군입니다.
나는 재빨리 "윗마을에 사는데 급한 환자가 생겨 이웃마을 친척에게 알리라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생각보다는 이런 말이 술술 나왔어요.



공산군 정규병들은 북한에서 왔기 때문에 이곳 지리를 잘 모르니까 그냥 통과시켜 주더군요.
여기서 나는 자신을 얻어 마냥 걸으면서 두번째 검문도 무사히 치렀습니다.
그런데 세번째만에 그만 들통이 났어요.
똑같이 대답했더니 "어느 마을로 간다는 거요?"라고 물어요.

내가 마을 이름을 알 턱이 있나요.
그러자 그자들은 또 "당신 사는 마을은 어디요?"라고 다그쳐요.

대답 못할 수밖에요.
검문자들은 (정규병이 아닌) 이 지방출신의 공산 유격대였어요.



 


(동네 사람 아닌데?영화 남부군 에서)




"수상한데, 도시 사람 옷차림 아냐, 신분증 보여!"

이제는 말도 반말이에요.
신분증이 있을 리가 있나요.



다짜고짜로 길 옆 초가집에 자리잡은 그 부락 인민위원회로 끌고가더군요.
(여사님 인민위원회 2회째...)

그리고는 광에 처넣어버려요.
그 속에는 여자가 한 명,
머리깎은 공산군 병사가 둘 갇혀 있어요.

여자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어매, 그것도 모른당가.
오산 북쪽 5리쯤 된 곳이랑게.
그래 워디로 갈 것이여 잉?"하고 되물어요.
전라도 사투리가 심한 여자입니다.



"더 남쪽으로 가려고 해요.
아기 낳으려고 영등포 친정집에 갔다
전쟁이 나서 남편에게 가려고요"

"통행증 가지고 있으라우?"

"없어요"

"그럼 틀렸당게,
절대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여.
나는 도중에 증을 잃어버렸는디,
암만 말해도 곧이 안 믿고 여기다 처넣어버렸당게.
싸게 가야지, 집에서 아이들이 기다릴 틴디"

"통행증이 없어도 죄 없는 피란민도 있지않아요?"

"북으로 가는 피란민은 괜찮은디,
남으로 가는 사람은 모두 반동이라 한단 말이여"


전라도 여자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두 병사는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감싼 채 앉아 있어요.
눈짓으로 누구냐고 물으니
그 여인은 입을 내 귀에다 대고 "도망병"이라고 속삭여요.


아침에 푸른 견장에 노란 별을 붙인 내무서원이 오더니 두 도망병을 데리고 나가요.
나는 문틈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얼마 안 가서 개울이 있고 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데까지 가더니 그 내무서원이 둘을 보고 뭐라고 해요.
그리고는 가라고 손짓을 하데요.
두 병사가 걸음을 재촉하며 다리위를 걷기 시작하자마자 따발총소리가 울리며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또 한 명은 몇 발짝 더 가다 앞으로 고꾸라져요.
내무서원은 귀찮은 듯이 두 시체를 발로 차 다리 아래로 처넣습디다.

가라고 해놓고 쏘다니 생각했지만,
그것을 봐두었기에 나중에 내가 살게 됐지요.



그날 오후에 아침의 그 내무서원이 조사하러 왔었죠."어디서 왔어?어디로?남편은 무엇하며 어디 갔어?" 속사포 같은 심문이에요.
뱀눈을 한 얼음같이 찬 사나이였습니다.
나는 이 심문에 앞뒤가 틀리지 않게 대답하느라고 무진 애를 썼지요.
하지만 제대로 될 수가 있나요.

"넌 수상하다.
눈만 봐도 반동이라고 써 있어.신분증은 왜 없지?
선량한 인민에게는 다 내주었는데 말이야"라며 심문을 끝마치더군요.



저녁이 되니 그 자는 나와 전라도 여자를 밖으로 끌어내서,
그 다리까지 데리고 가더니
"남으로 가면 반동취급 받으니까, 갈거면 북쪽으로 가라"고 해요.
전라도 여자는 정말 풀어주는 줄 알았는지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고 하더군요.
나는 곁눈으로 슬쩍 뒤를 보니 벌써 몇 명의 병사가 총을 겨누고 있어요.
그 내무서원이란 자는 능청맞게도
"자, 빨리들 가라"고 해요.

나는 두서너 발 옮기다가 다리 가장자리를 따라 냅다 뛰었습니다.
이내 '탕탕탕'하고 따발총소리가 들리며 뒤따르던 여자의 "아이고!"하는 비명이 귓전에 스쳐요.
그 순간 나도 총에 맞은 것처럼
스스로 그 자리에 쓰러지며 몸을 뒤틀어 다리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높이가 3,4미터는 실히 될 것 같았어요.
개울가의 자갈밭 위에 떨어져 꼼짝 않고 죽은 채 있었습니다.
좀 있으니까 바로 내 옆으로 전라도 여자의 시체가 떨어지더군요.
그들이 위에서 발로 밀어내버린 거지요.
곁눈으로 보니까 그 여자는 머리가 빠개져 보기에도 소름이 끼쳐요.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떡하면 남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궁리를 했지요.
별안간 묘안이 번개처럼 떠오르더군요.
그것은 공산군에는 여군병사도 섞여 있었다는 생각이에요.
의무대 간호병도 있었고 선전공작원에도 많았으니까.공산군복을 입고 가장하자.
공산군이 남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니까 의심을 받지 않겠지.
아침에 총살당한 도망병 시체가 아직 여기 어디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캄캄한 밤중에 시체를 찾는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그 때는 하도 악에 받쳐 무서운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찾아낸 시체에서 군복을 벗기려고 싸늘하게 식은 손발과 피투성이의 머리를 만질 때에는 덜덜 떨리더군요.
군복에는 피가 많이 묻어서 개울에 들어가 소리를 내지 않고 빨았지요.
그리고 알몸의 공산군 시체에는 내 옷을 입혀 수풀 속에 끌어다 감추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에서 몸에 흙칠을 하고 머리도 둥글둥글 아무렇게나 동여맨 다음 군복을 입었어요.(ㄷㄷㄷ)



아름다운 별들이 많이 뜬 밤이었습니다.
불과 한 달전만 해도 신혼 초의 남편과 함께 남산 밤길을 거닐며 보던 밤하늘과 조금도 다름 없는...

난 눈물을 흘리며 밤의 산을 타고 남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는 들판길로 나왔어요.
이제부터는 산에 있으면 오히려 도망병으로 몰릴 테니까.
길가에서 공산군이나 빨치산을 만나면 내가 먼저 "동무들 수고하오"하고 말을 건넸죠.
때로는 저편에서 "어느 부대요?"하고 물으면
"선전공작원이에요.동무부대는?"하고 되묻기도 하고.



 


(변복에 성공함)




평택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도중 미군 포로의 긴 행렬과 만났습니다.
모두가 지쳐 있더군요.
앞에 선 경비병이 나를 보고
"침략자들의 이 꼬락서니를 보시오"라고 소리를 빽 지릅디다.



충북 괴산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동북으로 돌려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전투가 있다는 것은 국군도 거기 있다는 증거이니까요.길이 몹시 험해요.
산길에서 화전민인 노부부만이 사는 집에 들렀더니 감자와 옥수수 찐 것을 한바가지 주어요.
어찌나 맛이 있는지 죄다 먹으니,
너무 배가 불러 일어나지를 못하겠더군요.
고생하며 괴산에 와보니 이미 전투는 끝나고 국군은 후퇴한 뒤에요.
전사자 시체가 늘어져있고요.



국군의 시체를 볼 때마다 '혹시 남편이 아닐까'하고 한 사람씩 얼굴을 살피고 다녔지요.
정신없이 시체 속을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동무, 거기서 무엇하는거요?"라고 한 장교가 소리쳐요.
가슴이 철렁 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는 표정으로

"선전공작원인데 선전재료가 될 만한 편지나 일기 같은 것이 있을까 해서요"라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그자가 아주 감격하면서
"선전동무, 정말 수고하오"하면서 가버립디다.

국군시체 얼굴을 다 살폈지만 남편은 없습디다.
안심과 함께 또한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 그 자리에 한참 주저 앉아 있었지요


 


(교과서에도 실린 시신에서 가족을 찾는 사진)




문경에서는 아직 국군이 버티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괴산에서 다시 그곳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거기서 빨치산이 국군 포로 몇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을 봤어요.그 중에 중위계급 장교가 있어요.
그런게 그 옆을 지나던 한 공산군 병사가 뛰어나가더니,

"야, 너, 나를 알아보겠니?"하고 소리쳐요.

중위는 잠시 살피더니,

"야, 너 아니냐"하며 희색이 만면이에요.
그러자 공산군 병사는 대뜸 국군 중위를 발로 걷어차며,

"이 너가 뭐야, !"라고 소리쳐요.
"는 내 중학 동창인데 조국을 배반하고 남반부로 도망쳐서 국방군에 들어간 놈이다"하고 외칩디다.

"용서해줘, 밥먹기 위해 군에 들어간 거야" >
중위는 두 손을 모아 빌더군요.

"절대 용서할 수 없어.너 같은 놈은 고향과 동창의 수치야.여보, 빨치산동부, 이놈을 나에게 넘겨주오"하니까,

"!"라고 빨치산이 응낙하데요.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가를 보여줄 테다"하며
공산군 병사는 중위를 길가의 나무에다가 붙들어매더군요.
그리고는 칼을 꺼내더니,

"이런 를 죽이는데 총알을 쓰기는 아깝다"면서,
"살려줘!" 가냘픈 소리를 내는 중위의 가슴, 배, 목 할 것 없이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난도질해요.


나는 이 때까지 꽤 참혹한 장면을 봐왔지만 이처럼 잔인한 살인은 처음 보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같은 동포인데 저렇게 무참히 죽일 수가 있을까?
동족간의 전쟁은 타민족과의 싸움보다 더 잔인한 것인가?
이북출신인 내 남편도 만약 안면이 있는 적에 잡히면 저렇게 되겠지 하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더군요.



문경을 떠나 상주로,
그러나 거기도 벌써 적지였습니다.
소문에 헌병들은 대전에 많이 있다기에 길을 다시 서남으로 돌려 그곳으로 향했지만
대전도 벌써 적수중에 들어 있습니다.
대전은 우리 부부에게는 추억의 도시죠.
3년 전에 남편과 처음 만난 곳도 여기고,
신혼여행도 여기로 왔었습니다.



그렇게 그리던 도시건만 전쟁에 불타 잿더미가 돼 있어요.
남은 건물이라고는 도청과 도립병원뿐이더군요.
도청은 공산군 본부로, 병원은 미군 포로수용소가 돼있더군요.
병원 앞에 갔을 때 미군기가 날아와요.
마침 그때 건물 안에서 웃옷을 벗긴 포로들을 몰고 나오데요.
포로들은 미군기를 보더니 손을 흔들고 휘파람을 불며 야단들이에요.
비행기에서 낙하산으로 무슨 상자들을 떨어뜨리니까 포로들이 환성을 올리며 주워요.
그러자 공산군 병사들이 매질을 하며 모두 빼앗더군요.
아마 미군물자를 빼앗으려고 계획적으로 포로들을 노출시켰나봐요.



 


(50년 9월말의 대전시내)




다시 대전에서 옥천으로,
그리고 이원(옥천군 이원면) 으로...
서울을 떠난 지 벌써 한 달 이상이 됐습니다.
그 고생 중에도 배는 자꾸 불러 이제는 누가 봐도 애기 밴 여자가 틀림없게 됐지요.
발은 퉁퉁 붓고 물집이 터지고 엉겨 신을 벗을 수가 없었어요.
옷도 걸레가 다되어 상거지 꼴이지요.
남편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은 나 혼자만의 망상일까?하지만 망부의 집념으로 몽유병자처럼 끝없이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낙동강변의 선산지역에 도달했어요.



 


(전쟁시기 낙동강변 어느 마을)




몸도 무겁고 헤엄도 못쳐 얕은 물을 따라 건너려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었어요.
깨어보니 빨치산에 잡혀 있어요.
거의 만삭의 몸이라 더 이상 공산군 여군이라 속일 수도 없어,
이 동네에 사는데 강건너 친정으로 가는 중이라고 핑계를 댔죠.
그런데 피란 안가고 이들에게 밥을 해주던 동네 노파가 저런 여자 모른다고 해서 탄로가 났어요.
그렇게 정치부에 넘어가 세 번에 걸친 모진 심문을 받다 또 기절했어요.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니 누가 맥을 짚고 있어요.누구냐고 물으니, 공산군 부대 13연대 소속의 군의관이라는 겁니다.



그는 자기 처가 전쟁직전에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며 나를 퍽 동정해요.
전날에 낙동강변에서 배고픈 김에 날 땅콩을 마구 캐먹어 복통이 심했는데
그 군의관은 다른 약은 없다며 아편을 조금 주더군요.
그걸 먹으니 배가 편해집디다.



그날 밤은 달도 밝고, 왜 그런지 꼭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달 보며 찬송가를 나지막하게 불렀어요.
그런데 그 군의관도 휘파람으로 따라 불러요.

그 사람이 하늘만큼이나 미더워지더군요.
그래서 집이 대구인데 아기를 거기서 낳게 데려다달라고 애원하여 이들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트럭에 편승하여 가다 폭격을 만나 다시 도보로 전선으로 향했죠.
도라지부대와 동행하는 동안은 도중에 검문을 받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이들과 섞여 걸었지요.



이렇게 최전선인 다부동까지 갔는데,
여기서는 다시 나를 심문해요.
최전방이니까 여간첩이 많다는 거예요.
대구 집이 어디냐고 묻기에 남산동 1가라고 했지요.
남산동 1가가 어디쯤이냐고 다시 묻는데 알 수가 있어야지요.
어물어물하니까 "신명고녀 근처냐"고 하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금방 발길질을 하며 간첩임에 틀림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그 군의관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데요.



 


(대구 남산1~4동의 현재 영역,

구한말 부터 광복까지 신명여자학교, 신명여학교, 남산여학교, 남산고등여학교, 신명여자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어온 학교는 좀 더 북쪽에 위치함.현재는 공학으로 변경되어 신명고등학교.
남산동은 대구의 원도심 중 하나로, 이정송 여사의 친정이 김천 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대구시내 아는 지명을 그냥 댄것으로 추정
당시에도 유명한 경북여고가 그 지역에 위치해 있기에 그냥 "남산동 경북여고 근처요" 라고 했다면 무사통과 였을까 싶은 대목)




새벽에 한 장교가 나를 불러내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나를 보고 똑바로 걸어가라는 거예요.
죽을 각오를 하고 열 발짝쯤 걸어가는데 총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어요.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아까 고지에서 몇 길이나 되는 개울가에 떨어져 쓰러져 있었어요.
다리의 찰과상 뿐, 신통하게도 다른 상처는 없었어요.
짙은 안개 덕분에 또 살아난 거지요.



요란한 포소리와 소총소리에 여기를 빠져나가야겠다고 나무를 꺾어 지팡이를 짚고 다시 걷기 시작했죠.
얼마후 웬 할아버지를 만나 대구길을 물으니 개울을 따라 50리쯤 가면 된다는 거예요.

개울 옆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수도관 같은 것이 여기저기 묻혀 있어요.
그 사이를 헤치며, 비틀거리며 가는데 시체가 하나있어 들여다보니까,
하반신이 날아가고 그 아래에 웅덩이가 파져 있어요.
수도관처럼 보인 것들은 지뢰입디다.
소름이 끼쳐 길 옆 산으로 들어가 거의 기다시피 했어요.너무도 지쳐서 정신이 깜박깜박해요.
이렇게 산길을 얼마쯤 걸었을 때 "정지!"하는 소리가 들려요.



보니까 1백미터 전방쯤 총을 겨눈 4명의 공산군 병사가 서 있더군요.
'또 잡혔구나'하며 털썩 주저 앉았어요.
이제는 더 도망갈 기력도 없구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어?" >
4명이 다가오더니 총을 들이대며 물어요.

"대구로 남편 만나러 가요"

"거짓말 말아.간첩이지!"

"아니에요.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도라지 부대 군의관에게 물어보세요.
얼마 전까지 도라지 부대 의무대와 함께 왔었으니까요"



부대라는 말을 듣더니 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저리로 가자"면서 고지 위로 데려갔습니다.거기서 장교같은 사람이 "뭐냐"고 물으니까
"도라지부대 여자입니다"라고 대답합디다.



"뭐, 틀림없나?"

"저 여자 자신의 자백입니다"

"이봐, 너 정말 도라지부대에서 왔나?" >
이번에는 나에게 물어요.

"네, 그렇습니다"

"응 그래?즉결처분!"

나는 처음에 그것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 멍하게 있으니까
네 병사들이 "이리 와!"하며 큰 바위 앞으로 끌고가더군요.
그리고는 총을 겨누는 거예요.



"아! 총살이구나.이젠 정말 죽는가보다" >
두 달 이상이나 이 고생을 했는데 남편도 못만나고 죽는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요.
산도 하늘도 그리고 총을 겨눈 병사들의 얼굴도 모두가 뿌옇게 보이구요.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그의 환상에 미소지으며, 총소리가 나기만 기다렸지요.이 때 "잠깐"하며 아까 그 장교가 "유언이나 듣고 총살하자"고 해요.

이제 신분을 속일 필요도 없다.
오히려 똑바로 밝히면, 혹시 여기 있는 자들의 입을 통해 내가 어떻게 죽었는가의 소문이 남편 귀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은채 마지막 있는 힘을 다 내어 소리쳤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서울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고 여기서 죽어요.
후회는 없지만 못만난 것이 슬퍼요.
내 남편은 당신네들 적인 국방군 장교이지만,
만약 그이가 당신네들한테 포로가 되거나,
또는 전쟁이 끝나 만날 기회가 있다면 부디 이렇게 전해주세요.
당신 아내는 끝까지 당신을 찾아 헤매다가 당신의 아내라는 행복감을 안고 죽어갔다고요..."


여기까지 소리치자 그 장교가 갑자기 내 앞에 뛰어오더니
"당신 남편 이름이 뭐요?"하고 물어요.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헌병소령 장우주"라고 떳떳이 말했지요.

"아니, 정말이요?장소령은 내 육사동창인데"하며 그 장교는 어쩔 줄을 몰라 해요.



(이때 이여사가 도달한 우군전선의 국군 1사단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9월 중순께 다부동 일대에서 우리 연대는 매일 심한 전투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순하 소령의 제2대대에는 우수한 수색대가 있어 적의 부연대장을 생포해오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어요.
배상사를 長(장)으로 한 4명의 수색대인데,
적의 군복을 입고 적진에 들어가 적정도 탐지하고 포로도 잡아오는 거지요.
그런데 하루는 한소령한테서 장우주소령의 부인이라는 여인을 잡았다는 전화가 왔어요.
장소령은 내 후배고 또 그와 한소령은 동기(3기)에요.
그러니 그 부인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게 없지요.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장소령부인은 초인적인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적중을 돌파해 왔더군요.
나도 놀랐습니다.")



 


(이정송 여사 이동경로)






[남편과 결국 처음 만난 것은 9월 28일,
바로 서울이 수복되던 날 부산에서입니다.
남편은 내가 효창공원 형장으로 끌려가더란 소문을 듣고 꼭 죽은 줄만 알았대요.
가슴을 울렁거리며, 만나면 서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면서 부산역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립던 남편을 만났는데도 웬일인지 그냥 멍 하니 있었어요.

남편도 다가오더니 싱긋 웃으며 그냥
"어디 아픈 데 없어?"라고만 해요.



퍽 극적인 상봉을 생각했지만 결과는 이렇게 싱겁게 됐어요.
동양사람과 서양사람의 차이가 이런 데 있는가보아요.






 


(결정적 순간 이여사에게 잠깐 유언을 듣자하여 이 모든 스토리가 가능하게 했던 남편의 육사동기 한순화 예비역 대령,

사진은 73년 동아일보에 실린 모습을 네이버 아카이브에서 캡쳐, 김점곤 소장의 회고와 달리 정확한 이름은 한순화 이다)






 


(부군 장우주 예비역 소장, 휴전후 제3보병사단장을 거쳐 예편, 적십자사 사무총장등을 거쳐 현대그룹의 종합상사, 종합기술, 건설, 특수화학, 한라건설등 계열사 임원으로 활약, 충무무공훈장 은탑산업훈장 수훈, 2014년 향년 88세로 별세)






이 이야기에는 불과 23세의 한 여인이 군인가족과 피란민 으로서 겪어야 했던 힘겨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함, 인간성 양극단의 한계, 적지에 남겨진 사람으로서의 고단함등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어,
흥미진진 하면서도 오늘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많은 생각을 겸허히 하게 하기에 이렇게 소개하여 봅니다.


가족과 일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새삼 느낍니다.

모든 장병여러분 감사합니다.

 

https://www.instiz.net/pt/7401826

 

영화보다 더 극적인 공산치하 서울탈출기 - 인스티즈(instiz) 이슈 카테고리

소개할 이야기는 전쟁초기, 임신 5개월의 몸으로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을 해야했던 당시 헌병장교 장우주 소령(육사 3기)의 부인, 이정송 여사(당시 23세)의 체험담이다.[6.2

www.instiz.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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