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 2026. 2. 11. 06:49

조선에 왔었던 하느님 서서평,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

요즘 서점가 베스트셀러는 죄다 '성공하는 법', '부자 되는 법'이다. 다들 "어떻게 해야 남보다 잘 먹고 잘 살까"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 100년 전, 정반대의 삶을 선택한 여자가 있다.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 서서평(Elisabeth Shepping)이다.

그녀가 조선에 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상처투성이'였다. 3살 때 독일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1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어머니를 찾았지만 종교 문제로 또다시 버림받았다. 평생을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트라우마 속에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이라는 나라의 참상을 듣는다.

1912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조선에 발을 들인 그녀는 스스로를 서서평이라 불렀다. 천천히, 그리고 평온하게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녀는 서구의 생활방식을 단호히 내려놓았다. 서양식 드레스 대신 무명 저고리를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월급을 받으면 족족 가난한 이들을 위해 쌀을 샀고, 정작 본인은 된장국에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녀의 헌신은 단순한 시혜가 아닌 자기 파괴적인 투신이었다.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던 한센병 환자를 등에 업어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길가에 버려진 고아 14명의 어머니가 되어주었다. 갈 곳 없는 여인 38명을 거두어 한집에 살며 그들에게 이름과 글을 가르쳤다. 이름도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로 불리던 이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아준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가진 것이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거지가 찾아와 추위를 호소하자, 그녀는 자신이 덮고 있던 유일한 담요를 반으로 잘라 건넸다. 남은 반쪽 담요 아래서 추위와 영양실조, 풍토병을 견디던 그녀는 결국 5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장례식 날, 광주 시내는 통곡 소리로 가득했다. 상여를 뒤따른 이들은 권력자나 부유층이 아니었다. 한센인, 거지, 창녀, 고아 등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유일하게 사람으로 대접해주었던 푸른 눈의 어머니를 향해 목 놓아 울며 상여를 뒤따랐다.

[팩트]

1934년 6월 26일, 그녀가 죽고 난 뒤, 광주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짐.
유품으로 남은 것은 동전 두 개와 강냉이 가루 두 홉, 그리고 찢어진 담요 반 조각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의 침대맡에 적혀 있던 한 문장은 오늘날 성공의 신화에 매몰된 우리에게 가슴저리게 다가온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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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9월 26일 독일 제국 헤센 대공국 비스바덴 프랑켄에서 태어났다. 3세일 때 어머니가 미국 뉴욕으로 홀로 이민가고, 조부모에게 맡겨진다. 9세에 할머니를 잃고,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엄마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 마르코 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다. 뉴욕시립병원 실습하던 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개신교로의 전향을 결심한다.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후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한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에서 1년 동안 봉사하였다. 1911년 졸업 이후 동료 선교사에게서 조선에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질 정도라서 의료 봉사가 절실하다는 말을 듣고, 한국 선교를 지원한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모집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어머니의 신앙인 가톨릭을 따르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다. 3세 때, 10대 때, 마지막으로 40대에 어머니에게 모두 세 차례 버림당한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지만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1912년 2월 20일 한국으로 파송된다. 여객선 S.S.Korea호를 타고 20여 일 여행 끝에 한국에 도착한다. 광주 선교부 제중원(現 광주기독병원)(원장 우월순)의 간호사로서 병원과 주일학교를 돕는다.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생 가족처럼 지낸 입양아로 박해라, 문안식, 문천식이 있다.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사망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다. ‘나환자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였다. 임금 대부분을 빈민과 병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다.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14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38명이다.

광주 양림동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했다. 뽕나무를 더 심고 시설을 세우기 위해 미국에 기금을 요청했다. 제주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고사리 채취를 도왔다. 임종 때에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하였다. 장례에 자신의 세운 이일학교의 학생이 운구 행렬을 이루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1]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묘소는 선교사들의 거주지이던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있다.

https://namu.wiki/w/%EC%84%9C%EC%84%9C%ED%8F%89

서서평

성공이 아닌 섬김 평생 조선인을 위해 헌신한 독일계 미국인 간호사 . 생애 어린 시절 1880년 9월 26일 독일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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