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용서했고, 성경은 배신했다
— 유다, 질문으로 남겨진 자
나는 오래전부터 이상했다. 예수는 분명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는데, 왜 그의 이야기에서 단 한 사람만은 끝내 사랑받지 못했는가. 왜 간음한 여자는 돌에서 풀려났고, 살인자는 사도가 되었으며,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한 제자는 교회의 기둥이 되었는데, 유다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버려진 채로 남아 있는가. 이건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너무 노골적이고, 너무 비겁하다. 마치 이야기를 깔끔하게 끝내기 위해 누군가에게 모든 더러움을 떠넘긴 느낌이다.
기독교는 늘 십자가 대속을 말한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고. 그런데 그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할수록 한 가지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지옥에 떨어졌는가. 만약 예수가 정말 모든 죄를 가져갔다면, 유다에게 남은 죄는 무엇이었는가. 배신? 웃기지 마라. 그날 밤 예수를 버린 건 열한 명 전부였다. 차이가 있다면, 유다는 그 사실을 끝까지 혼자 감당했다는 점뿐이다.
복음서는 유다를 악역으로 고정시킨다. 그는 탐욕스럽고, 음흉하며, 은전 몇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비열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묘사는 지나치게 연출적이다. 마치 독자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감정을 몰아붙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유다를 조금만 인간으로 바라보는 순간, 이야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이 구원이 되려면, 누군가는 절대적으로 더러워야 한다. 그래서 유다는 용서받을 수 없어야 한다. 이건 신학이 아니라 서사 관리다.
생각해보라. 빌라도는 손을 씻었다. 로마는 책임에서 빠져나갔다. 군중은 선동되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았다. 심지어 예수를 직접 못 박은 병사들조차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비난의 중심에서 비켜선다. 그런데 유다만은 다르다. 그는 변명할 기회도, 회복의 서사도, 재해석의 여지도 없이 단번에 폐기된다. 자살이라는 결말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편집자의 선언이다.
예수는 정죄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복음서는 유다에게 단 한 번의 재시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질문은 여기로 돌아온다. 도대체 누가 예수를 배신한 것인가. 은전 몇 닢에 스승을 넘긴 제자인가, 아니면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먼저 버린 기록자들인가.
이 글은 유다의 도덕성을 변호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문제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정경이 완성되는 방식이다. 더 정확히 말해, 기독교 구원 서사가 작동하기 위해 누군가는 끝까지 구원 불가능한 존재로 고정되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죄는 십자가로 이동하지만, 책임은 이동하지 않는다. 예수는 죄를 대신 죽었고, 유다는 죄의 얼굴로 남겨졌다. 이 분리는 우연이 아니다. 그래야 구원은 안전해지고, 질문은 봉인된다.
여기서 구조를 하나 더 열어야 한다. 이것은 유다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완성된 종교 서사는 언제나 한 쌍을 만든다. 선택된 자와 버려진 자. 사랑받는 자와 남겨진 자. 이 쌍은 처음부터 존재해왔다. 성경은 늘 누군가를 들어 올리는 동시에, 누군가를 남겨두는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남겨진 자는 말할 수 없게 된다. 말하는 순간, 질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유다는 예외가 아니다. 그는 오래된 구조의 최신 표본이다. 텍스트가 스스로를 닫기 직전, 반드시 필요해지는 마지막 어둠.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질문이 사라져야 하고, 질문이 사라지려면 질문을 몸으로 떠안는 인물이 필요하다. 유다는 그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그는 돌아올 수 없었다.
신학은 이 불편함을 피해 간다. 자유의지, 예정론, 신비라는 단어를 꺼내 들며 설명을 끝내려 한다. 하지만 그건 설명이 아니라 도망이다. 만약 유다가 없었다면, 십자가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다는 ‘필요한 인물’이었고, 필요했던 인물이라면 그 책임을 혼자 떠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군가 끝까지 저주받아야, 나머지가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 구원론의 작동 방식이 드러난다. 그것은 죄를 제거하는 체계가 아니라, 죄를 집중시키는 체계다. 죄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한 곳으로 모인다. 십자가는 죄의 출구이고, 유다는 책임의 수거함이다. 이 이중 장치가 유지되는 한, 공동체는 깨끗해진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깨끗함은 언제나 누군가의 폐기 위에 세워진다.
이 구조는 과거형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있다. 교회는 늘 유다를 필요로 한다. 의심하는 자, 질문하는 자, 끝내 “아멘”을 삼키지 못한 자. 그들을 바깥으로 밀어내야 안쪽의 신앙이 유지된다. 예수의 이름은 사랑을 말하지만, 그를 둘러싼 체계는 언제나 배제 위에서 작동해왔다. 유다는 한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위치다.
그렇다면 성경은 완성되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완성될 용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완성된 텍스트란 더 이상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텍스트다. 그리고 질문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영원히 질문의 자리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유다는 그렇게 제거되었다.
만약 유다를 용서하는 순간, 이 체계는 작동을 멈춘다. 더 이상 죄를 떠넘길 곳이 없고, 더 이상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밀어낼 명분도 사라진다. 그 순간 신앙은 처음으로 위험해진다. 안전한 구원이 아니라, 책임을 동반한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다는 끝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돌아오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종교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아직 부활하지 않았다. 그 가르침이 부활하는 순간은 단 하나다. 유다가 다시 텍스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배신자로서가 아니라, 질문으로서. 용서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라, 끝내 제거되지 말았어야 할 물음으로서.
유다가 구원받는 날, 성경은 끝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 종교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악역이 없고, 더 이상 책임을 떠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의 신앙은 훨씬 불편해질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때서야 비로소 인간적일 것이다.
나는 차라리 그 불편함을 택하겠다. 유다와 함께 서 있는 예수, 정죄하지 않는 신, 그리고 끝내 닫히지 않는 이야기. 완성되지 않았기에 계속 읽히는 텍스트, 완결을 거부했기에 살아 있는 성경.
그게 지금 우리가 여전히 이 이야기를 붙잡고 있는 이유라면, 이 성경은 아직—써먹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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